[ 질문 ] 직관과 투영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요?
[ 샨티마이 ] 그대 자신의 느낌과 사념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들은 외부의 대상에 투영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감정과 견해를 통해 외부 상황을 채색하고 거기에 자신의 관념을 던져 넣는다. 이것이 투영이다. 직관이란 어떤 관념의 개입도 없이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앎이다. 직관은 기존의 관념을 거치지않고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통찰력이다.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 투영과 직관이 어떻게 다른지 알겠는가?
[ 질문 ] 저는 곧 대학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그 곳에서 저는 많은 지식을 얻게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식(knowledge)과 지혜(wisdom)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 샨티마이 ] 지식이 반드시 지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혜는 언제나 지식이다. 지식은 조건적인 것이며 지혜 또한 그러하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는 밝은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지식에 이런 통찰력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지식보다 더 광범위하다. 왜냐하면 지혜는 우리가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언제나 상황의 귀결을 고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혜는 그렇게 한다. 지혜는 주어진 상황을 더 밝고 넓은 각성의 눈으로 보게 한다. 지식이 이런 자각의 빛을 갖게 될 때 이 지식은 지혜가 된다.
[ 질문 ] 채식주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 샨티마이 ]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그대는 영적인 각성을 위해 채식주의가 중요하다는 뜻으로 묻는 것인가? 채식주의자가 아니면서도 영적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나는 생애의 거의 대부분을 채식주의로 살아왔다. 내게는 고기를 먹는 것보다 채식을 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동안 동물을 죽인 적이 없다. 우리 아쉬람에서는 채식을 한다. 채식은 몸에 부담이 덜하다. 육식을 삼가하는 것은 몸의 생리학적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대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채소와 곡물을 재배하는 것보다는 가축을 기르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와 경비를 필요로 한다. 채식을 하는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가능한 한 무공해의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일리가 있다. 채식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그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만일 당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면 채식은 건강을 회복하고 육체를 편안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건강한 육체는 참으로 이로운 것이다. 영적인 길은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좋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거기에 마음을 뺏겨버리기 때문이다. 내 말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과 이해력이 탁월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좋은 건강이란 그저불필요한 장애물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 질문 ] 저는 여러군데 사트상에 참여한 적이 있으며, 그것은 아주 축복어린 경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간혹 의심이 듭니다. 사트상을 주는 그들 모두가 깨달은 것일까요?
[ 샨티마이 ] 아니다. 사트상은 깨달은 스승의 현존을 필요로 한다. 의심이 그대를 혼란시킬 때에는 그저 고요하게 침묵하라. 그러면 곧 혼란 또한 침묵이 되어 가라앉을 것이다.
[ 질문 ] 나 자신이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나'라는 동일시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끔찍하도록 절망적이고 무력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이런 경우에 대해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 샨티마이 ] 자신을 분리된 개체나 육체, 마음이 아니라고 자각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 뿌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더 깊은 자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나'라고 하는 개념으로부터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가능성이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은 뿌리가 없는 것이며 실제적인 근거가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사념이나 꿈 이상의 것이 아니다. 절망이 오는 것은 여전히 확고한 근거를 가진 인물(someone)이나 사물(something)에 대한 욕구와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을 몸과 마음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것, 역사, 이름, 성별, 국적, 인격 등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깊은 각성으로 들어가는 여행의 시발점이다.
이 곳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얻은 것은 우주 삼라만상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더 심오한 통찰력에 대한 힌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이 얻은 것은 힌트일 뿐이다. 그대의 절망이 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가 삶의 흐름을 관찰하게 하라. 진실로 알게 되면 절망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절망이란 그 절망을 경험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정진하라. 지금 그대는 행운의 문턱을 넘기 직전에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 질문 ] 흔히 사람들은 하늘의 은총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토록 진지하게 깨달음을 열망하는데 왜 그런 은총이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요?
[ 샨티마이 ]하늘의 은총은 자기만의 방식에 따라 작용한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은총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그대는 진리가 언제 그대를 찾아올지 모른다. 만일 진리가 찾아오면 그대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존재계에는 참으로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미지의 차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미지의 차원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미지의 차원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굴의 인내와 순종이 필요하다.
이것을 명심하라. 때가 되면 은총은 틀림없이 그대를 찾아온다. 깨달음은 전체적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내와 순종이다.
깨달음이란 지금의 그대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변모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비개인적이고 전체적인 자신의 본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한다. 나는 은총을 기대하지 말고 그대 앞에 펼쳐진 삶을 강렬하게 살라고 제안한다.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라. 그러면 그대는 더 빨리 무르익을 것이다. 기다림의 길이 아니라 삶과 존재의 길을 열어라. 인내하는 자에게 은총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 은총 안에서 그대는 자신의 본성이 곧 깨달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 깨달음은 항상 존재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 안에 존재한다.
[ 질문 ]자신을 몸과 마음이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은 첫 걸음에 불과한 것입니까, 아니면 깨달음의 전부입니까?
[ 샨티마이 ] 둘 중의 어느 경우도 될 수 있다. 자신을 몸과 마음이 아니라고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직접 체험해야 한다. 앎은 첫 걸음인 동시에 첫 걸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유명한 개념은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만큼 소중한 아름다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축복이다. '나는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라는 앎은 그대를 어떤 문으로 이끌어야 한다. 이 문 안에 들어서면 그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질문 ] 진아를 깨닫기 위해 사랑이 그 길이 될 수도 있습니까?
[ 샨티마이 ] 그렇다, 사랑이 그 길이다. 그대가 체험한 온갖 종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향하게 하라. 그대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서이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아무 조건도 없다는 뜻이다. 이때 의식은 침묵의 각성 안으로 흘러들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무제한의 자유를 준다. 진리를 실현한다는 것은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 질문 ] 훌륭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샨티마이 ] 그것은 최고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 질문 ] 육체가 없을 때에도 사념이 있을 수 있습니까?
[ 샨티마이 ] 육체가 곧 사념이다. 사념과 육체는 서로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것이다. 단어와 그 안에 담긴 의미처럼.
[ 질문 ] 언어없는 사념이 있습니까?
[ 샨티마이 ] 언어가 곧 사념이다. 무엇을 인지한다는 것은 사념과 언어를 의미한다.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 둘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경험한다. 그러나 주의깊게 들여다보면 그대는 언어와 사념이 아무런 실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어란 단순히 입 밖으로 나온 단어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념이 없으면 언어가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념이 없다.
[ 질문 ] 사랑하는 연인끼리 서로 다른 스승을 따를 수도 있습니까?
[ 샨티마이 ] 물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가슴에 의해 결정된다. 대부분의 커플이 같은 스승을 따르기는 하지만 간 혹 두 사람의 가슴이 서로 다른 스승에게 끌릴 수도 있다. 커플이 상대방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스승 또한 존중해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내 학생들 중에도 서로 다른 스승을 섬기는 커플이 몇 쌍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 다른 스승을 섬기면서도 나란히 길을 갈 수 있을만큼 성숙한 사람들이다. 분명히 이런 길은 힘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 이런 상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열린 가슴과 서로를 지원해주는 배려를 필요로 한다. 한 가족이 서로 다른 스승을 섬기는 것은 정신적인 성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두 사람의 스승이 한 커플을 만물이 하나되는 차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 될 수 있다.
모든 스승들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개인에 따라 표현방식이 다를지라도 어느 정도 같은 길을 가리키고 있다. 왜 그런가? 만일 한 커플의 길이 정반대로 나아간다면 당연히 길이 갈리고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을 강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틀리고 나는 옳다."는 식으로 설득하려고 하지 말라. 구도의 길이란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만일 한 커플이 이런 차이점을 인정하고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그들은 그들 내면의 분열되지 않은 본성을 이해하는데 한층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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