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이야기

아이에게 사랑을 가르쳐라

얼릉얼릉 2011. 2. 13. 12:23

아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아이는 태어날 때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점차 커 가면서 사랑의 조화는 깨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예외 없이 정말 사랑스럽다, 너무나 아름답다. 그대는 추한 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아이의 아름다움은 몸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내면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다. 아이의 내면에서 밝게 타오르는 사랑의 등불은 온몸을 통해 우러나와 사방으로 그 빛을 발한다. 아이는 무엇을, 어디를 보든지 사랑으로 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라면서 그 사랑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이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을 지키고, 돌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저 아이에게 사랑은 위험하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어떠한 것이 됐든, 믿지 말고 의심해 보라고 가르친다. 무조건 믿어 버리면 다른 사람들한테 이용당하기 쉽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바보짓이니까 때론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배반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어디나 있는 법이다.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지 않으면 속거나 빼앗기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 세상에는 도둑놈들뿐이라고 가르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세상에는 도둑놈뿐이라는 사실은 결코 잊지 않으면서, 도처에 신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사회는 아이들에게 도둑놈들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법을 훈육시킨다.

이런 식으로 아이를 길러서야 어떻게 아이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사랑은 그저 위험한 것인가? 사랑은 신뢰를 의미한다. 사랑은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의심은 항상 방심하지 않고 경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방어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방향에서, 어느 순간에 공격의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24시간 경계 태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격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우리는 아이를 바짝 군기가 든 군인처럼 기른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가 사회를 적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아이가 철이 든다고 말한다. 아이는 이때쯤이면 사랑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온통 경쟁 상대와 적들뿐이다. 주위 사람을 친구로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조차 의심하기 시작할 때 이제 사회생활을 할만큼 철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아이에게 “어른 다 됐구나”라고 말한다. 이제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 살기 시작한다.

까비르는 말한다.
“속이려 들지 말고 언제든지 속을 준비를 하라. 속는다고 해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남을 속이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까비르가 말하는 ‘모든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꾸 속이려 들면 사랑의 원천이 줄어든다. 자신이 속이려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타인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되면 사랑이라는 꽃은 피어날 수 없다. 두려움은 독이다. 이런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때 어떻게 사랑이 꽃피어 날 수 있겠는가? 두려움의 땅에서 꽃피는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두려움 속에서 나오는 것은 증오밖에 없다. 적개심만이 두려움의 땅에서 자란다.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두려움 때문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돈으로, 집으로, 온갖 것들로 자신을 보호하는 데 온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는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자신을 보호하는 데만 온 신경을 쓰다 보면 자신의 모든 문들을, 사랑의 문들을 닫아 버리고 있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이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완벽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서 얻은 방어와 안전은 무덤의 것, 바로 그것이다.

옛날 어느 황제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궁전 하나를 지었다. 황제의 돈과 권력을 탈취하려고 주위에 도사리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라는 사람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안전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황제는 세상의 온갖 부와 명예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찬탈(簒奪)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황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만큼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 황제는 자신이 지은 궁전에 입구를 딱 하나만을 만들어 놓았다. 문도, 심지어 창문도 내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은 전혀 없었다.

한번은 이웃나라 왕이 이 궁전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다. 이웃나라 왕은 궁전의 철통같은 안전 시설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궁전이었다. 궁전의 입구는 오직 하나인데다가, 그 입구에는 엄중하게 선발된 특수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호위병들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다. 누가 아는가, 한밤중 몰래 호위병 중 한 명이 황제를 죽이려고 들지? 그래서 호위병들은 주도면밀하게 선발되었다. 각각의 호위병은 자기 바로 밑의 하급자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웃나라 왕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말했다. “나도 이런 궁전 하나를 짓고 싶습니다.”

마침 길가에 앉아 있던 거지 하나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는 큰 소리로 웃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거지를 향해 몸을 돌리자 거지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 분 다 한 가지 모르시는 게 있으시군요. 저는 여기에 이렇게 앉아 구걸을 하면서 궁전 짓는 것을 지켜보았어요. 궁전 입구는 하나뿐이지만 누가 미래의 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조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궁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 있는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아 버리는 거지요. 그러면 안으로 침입할 수 있는 틈바구니조차 없어지게 되니까 완벽하게 안전해지지요.”
황제가 말했다. “이 바보 천치 같은 놈. 그럼 궁전이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거지가 대답했다. “이미 무덤이 되어 버렸잖아요. 마지막 남은 문을 닫아 버리는 것이 무덤이지요.”

우리 모두는 이렇게 죽어 가고 있다. 우리가 자신을 방어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우리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대는 너무나 많은 방어와 안전 조치를 취하기 때문에 삶은 무기력해진다.
생생하게 살아 있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방비 상태로 살아라.

삶의 만트라는 무방비 상태로 사는 것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살면 불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돌은 안전하지만 꽃은 위험 속에서 산다. 돌은 죽어 있지만 꽃은 생명력으로 넘쳐흐른다. 폭풍이 몰아치면 꽃은 그 잎을 떨구겠지만 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꽃들에게는, 개구쟁이들이 와서 그 꽃을 따기도 하겠지만 돌은 거기에 쓸모 없이 그대로 놓여 있을 것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면 꽃은 시들겠지만 돌은 황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무런 반응 없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돌이 안전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돌멩이가 되고 싶은가? 그대가 선택한 상황은 바로 돌멩이의 상황에 다름 아니다! 그대는 돌멩이처럼 굳어져 버렸다. 꽃은 항상 위험 속에 산다, 사랑이 꽃이다. 사랑보다 더 위대한 꽃은 없다. 사랑보다 더 의미 있는 꽃은 없다. 또한 사랑만큼 위험 속에 존재하는 것도 없다.

사랑이 삶이다. 사랑은 그대 문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며, 그대가 드넓은 하늘 아래 서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위험 또한 커지겠지만, 그러한 것이 바로 삶의 정수이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적의를 가진 상대가 그대를 공격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친구가 찾아와 그대를 껴안는 것이다.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은 곧 친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다. 자신의 주위에 장벽을 쌓는 것은 곧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항상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항상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시달릴 것이다. 사실은 무엇을 상실한 것이 아니다. 그대 가슴이 열리지 않고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상실감에 시달리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별 탈 없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교육을 시킨다. 그런 교육은 사랑이 메말라 가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그런 다음 부정한 수단을 써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제 사랑은 더욱 메말라 간다. 그런 다음 이기주의자가 되는 법을 가르친다. 그때 사랑은 죽는다. 사랑으로 넘쳐흘러서 남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인생에서 승리하라고 가르치지 결코 패배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우리 가문, 우리 사회, 우리 국가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열심히 싸우라고 가르친다.

한번은 물라 나스루딘의 장남이 가출을 했다. 물라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나중에 물라는 아들이 극단(劇團)에 들어가서 명배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물라는 가출했던 아들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아들이 속한 극단이 물라가 사는 읍내로 공연을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라는 친구들을 몽땅 초대해서 1등석 티켓을 사서 나누어주었다. 물론 그는 나도 초대했다. 물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대단한 배우가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몹시 들떠 있었다. 물라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다.

공연하는 날 저녁 우리는 함께 극장에 갔다. 공연이 시작되고 1막이 거의 끝나 가는데도 물라의 아들은 나오지 않았다. 물라는 좌석에 걸터앉아 초조하게 기다렸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었다. 아들은 2막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제 물라는 약간씩 풀이 죽기 시작했다. 3막, 4막이 열렸지만 아직도 무대에서 물라의 아들을 볼 수 없었다. 거의 막을 내릴 무렵 물라의 아들이 손에 총을 들고 무대에 뛰쳐나왔다. 그가 맡은 역은 보초였던 것이다. 아들은 무대 입구 바로 앞에서 총을 들고 앞뒤로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었다! 물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 댔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할 말이 없어도 가문의 명예를 위해 총이라도 쏘아야 할 게 아니냐! 집안 망신이다, 이 멍청한 놈아!”

우리는 아이들에게 명예와 위신과 허영을 가르친다. 가문의 위신과 명예를 더럽혀서는 절대 안된다고 늘 훈계한다. 자신과 남을 사랑하라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그대는 아들이 반에서 1등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렇게도 좋아하지 않는가?  아이가 학교에서 1등이라도 하는 날에는 아이에게 더없이 상냥하게 대해 준다. 그리고 친구나 이웃에게는 떡을 돌리기도 한다.

그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그대는 아이에게 항상 1등만 하라고 주입한다. 꼴찌가 될 줄 아는 자만이 사랑을 받을 줄 안다. 하지만 그대는 아이에게 야망을 품고 경쟁하고 싸워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항상 1등을 하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그대는 아이에게 야망과 술수를 가르쳐서 정상배(政商輩)로 만든다. 이렇게 해서 그대 아이는 일생 동안 어떤 일이 됐든 1등만 하려고 발버둥질을 칠 것이다. 훗날 아이는 정치나 경제 등의 최고 위치에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삶의 알짜배기를 잃어버렸음을 알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가슴과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놓쳐 버렸음을 알고 자신을 한탄할 것이다.

정치꾼은 그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른다. 그에게는 친구가 없다. 친구가 있을 수 없다. 인디라 간디에게도 친구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녀처럼 권력을 쥐고 있는 자에게는 친구가 있을 수 없다. 그녀 주변을 맴도는 자들 모두가 그녀의 적들이다. 그녀를 몰아내려고 바둥대는 자들이다. 이러한 정적들 때문에 인디라 간디는 그렇게도 자주 개각(改閣)을 단행했던 것이다. 한 직위에 같은 사람을 오랫동안 놔두는 것은 그로 하여금 힘을 키울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주기 때문에 위험하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세력을 키운 자는 기회만 오면 인디라 간디 정권을 무너뜨리고 권좌에 오르려고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권좌에 오르는 모든 자들의 술수다. 정치꾼들에게 사랑이라…….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정치는 권모와 술수, 갈등과 경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가 자식에게 사회 경쟁에서 최고가 되라고 외치는 것은 자식에게 원한과 반감, 그리고 적개심을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자식들이 돈을 싹싹 긁어모아서 갑부가 되기를 바란다. 집에 엄청난 돈을 쌓아 놓고 사는 사람들의 인생에는 사랑이 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을,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다. 진짜 부자는 참된 사랑을 가슴에 지닌 이들이다. 참된 사랑을 지닌 사람은 세상의 부(富)를 얻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치지 않는다.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라. 돈은 사랑의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구두쇠나 인색한 자의 삶에서는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색한 것이다. 구두쇠는 사랑의 대용품으로 돈을 쫓아다닌다.

그대 삶에 사랑이 찾아오면 그 사랑은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나중에 그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그대 삶이 사랑으로 넘쳐흐르면 그 사랑은 기도가 되어서 신이 그대를 돌보게 된다. 신이 자연의 나무와 새들을 그렇게 잘 돌보는데, 나를 푸대접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삶에 사랑이 없으면 은행 통장 말고는 자신에게 마음을 써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한다. 돈만이 그대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사랑 없이 늙으면 누가 그대를 돌봐 줄 것인가? 누가 그대 등을 긁어 줄 것인가? 누가 신경 써 주고 도와줄 것인가? 그대 삶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도 그대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대에게 남은 것은 돈밖에 없게 된다. 친구라곤 돈뿐이다. 사랑이 없는 인색한 삶에는 돈을 제외하곤 애정도 보살핌도 없다. 부자는 자신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만큼, 가슴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의 본질은 나누는 것이다. 사랑은 긁어모으기만 하는 것을 모른다. 긁어모으기만 하는 사람은 나눌 용기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그에게는 가슴도 없고, 나누고자 하는 따뜻함도 없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요 그 자체로 자선이다. 사랑은 모든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그대는 자식에게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이름을 날리고, 알렉산더가 되고 나폴레옹이 되라고 가르친다. 이는 자식이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이 되는 것을 막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가르쳐서야 어떻게 자식이 참된 인간이 되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자식이 참된 인간이 되면 나폴레옹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고 발버둥치지 않는다. 그저 한 인간이 되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며 짐승만도 못한 것들을 추구할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인간적인 속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증오와 폭력은 그대를 비인간적인 사람을 만들지만, 사랑은 그대를 신의 문으로 인도한다.

그대가 아이에게 주입하는 욕망과 야망으로 인해 아이는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나하나 자신과의 관계가 깨지기 시작한다. 하나하나 가슴과 이어져 있던 것들이 잘려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제 아이는 뿌리가 잘려 나간 채 살아야만 한다.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여기저기 떠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아이가 커서는 무엇을 언제 잊어버렸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지를 않는다. 아주 어려서 잃어버린다. 그대가 아이를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가도록 교육시킬 때 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아이는 그냥 그대를 믿고 따를 뿐이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믿고 하라는 대로 따라 할뿐이다. 아이는 이제 사회?문화에 순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어른이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한다. 아이는 무엇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전체적인 모습을 알 수 없다. 아이의 무지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서 아이의 뿌리가 잘려져 나간다.

일본에는 나무를 자신들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가꾸는 정원사들이 있다. ‘분재(盆栽)’라는 것이 일본 정원사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가꾸는 것이다. 스와미 람(Swami Ram)이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는 그런 나무들을 보고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는 어떻게 그런 나무도 존재하는가 의아해 했다는 것이다. 2, 3백년씩이나 된 나무들의 키가 겨우 15에서 20센티밖에 안되는 것이었다! 3백살 먹은 나무가 겨우 15센티라니 그로서는 정말 믿을 수가 없어서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일본 정원사에게 물어 보았다. 분재는 자라기는 하지만 크지를 않는다. 줄기가 통통해지기는 하지만 위로는 크지 않는 것이었다!

정원사는 스와미 람에게 비결이 계속해서 뿌리를 잘라 주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무를 밑이 터진 화분에다 심어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도록 막을 뿐만 아니라 뿌리 끝을 주기적으로 잘라 준다고 정원사는 설명했다.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높이 자랄 수가 없다. 나무가 자라면서  줄기가 굵어지고 나중에는 시들어 가면서 늙어 보이겠지만 위로는 크지를 않는다. 나무를 위로 자라게 하려면 나무로 하여금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만 한다.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린 만큼 위로 크게 자란다. 그 비율은 항상 일정하다. 규칙적으로 나무 뿌리를 잘라 버리면 나무가 위로 클 도리가 없다. 발육 부진 상태에 머물고 만다. 일본에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분재를 키우고 있다. 그날 스와미 람은 자신의 일기장에 “악마는 이와 같은 식으로 인간의 뿌리를 잘라 내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라고 적었다.

누군가가 인류의 뿌리를 계속해서 자르는지, 인류는 이렇게 발육이 부진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나무 뿌리는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나무는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이처럼 그대 가슴에도 사랑의 뿌리가 잘려 나갔다.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지 않으면 그대는 다시 사랑의 뿌리에 도달할 수 없다. 절에 가고 성당에 간다고 해도 소용없다. 예불을 드리고 예배를 한다고 하더라도 소용없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는 하늘에, 신에게 가 닿지 않는다. 오직 사랑의 기도만이 신에게 가 닿는다. 사실은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면 기도조차 할 필요 없다. 사랑이 현존하고 있으면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신은 그대를 듣는다. 하지만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도 신에게 가 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