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이야기

교육에 관한 편지

얼릉얼릉 2010. 12. 26. 12:52

1. 종교 :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

2. 암시 : 뜻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표현법.

3. 훈육 : 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름

 

모든 교육의 기초에는 현재 학교에서 도외시 하고 있는것, 즉 종교적 인생관이 없으면 안되며, 그것도 수업을 통해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활동의 지도원리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 생각에는, 현대인들의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종교적 인생관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은것이 아닐까 합니다. 즉 우리의 인생의 의의는, 우리가 자신을 그 일부로 느끼고 있는 무한한 존재의 의지를 실천하는데 있으며, 그 존재의 의지는 살아있는 모든것, 특히 우리인간의 일치에,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한 형제처럼 서로 도우며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적인 인생관을 다른측면으로 표현한다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생명과의 일치,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형제처럼 사이좋게 돕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무한한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어야만 참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전체의 섭리는 바로 그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어째든 종교적 인생관에서 일어나는 생명현상은, 사람에 의한 만물의 일치이며, 무엇보다 인류화합의 관계형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최대의 실천적 법칙으로, 교육의 기초에 두어야 할 것이며, 그래서 어린이의 내부에 이러한 일치로 이끄는 모든것을 개발하고, 분열로 있는 모든것을 억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뿐만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할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어리면 어릴수록, 의사들이 암시의 제 1단계라고 부르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상태에 있기때문에 많은것을 배우면서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암시에 대한 감수성으로 인해 그들은 완전히 어른들의 영향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암시를 줄 때는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친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게 사람은 항상 암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하기 마련인데, 이 암시에는 의식적인 암시와 무의식적인 암시,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기도에서 노래와 춤, 음악에 이르기 까비 모두 의시걱 암시이며, 우리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어린이가 모방하는 것, 특히 우리 어른들의 생활과 어른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은 모두 무의식적인 암시가 됩니다. 의식적인 암시는 교육이고 훈육(품성이나 도덕 따위를 가르쳐 기름. )이지만, 무의식적인 암시는 실제 행위의 모범이자, 좁은의미에서의 양육이며, 내 식으로 말하면 계발입니다.  현대사회에서는 전자(의식적임 암시)에 모든 노력이 기울어 지고 있고, 후자(무의식적인 암시)는 우리의 생활이 열등하다고 해서 등한시 되고 있습니다. 교육자인 어른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린이를 군사학교, 전문학교, 기숙사 같은 특수한 환경에 가두고, 자신들의 생활과, 일반적인 어른들의 생활은 어린이 들의 눈에서 가리거나, 무의식적으로 해야 할 것을 의식의 영역으로 가지고 가서 도덕생활의 규칙을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데, 그 경우,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되 내가 행하는 것을 하지마라()고 주의를 주지는 않는것이 현실입니다.(성경에 예수의 가르침중에 비슷한 말이 있음).

 

그래서 현대사회에서는, 이른바 교양만이 앞서가고, 진정한 교육, 진정한 계몽은 완전히 뒷전이 되어 있습니다. 어딘가에 진정한 교육이 있다고 한다면, 오로지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 있을뿐입니다. 그런데 어린이에 대한 무의식적인 영향과 의식적인 영향 두기지 중에서 전자 즉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도덕적 영향이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테면 은행가, 지주, 화가, 작가 같은 사람의 가족이 유복한 생활을 하면서도 술에 탐닉하지도 않고 방탕하지도 않으며, 누구와 싸우지도 않고 남에게 가혹한 처사도 하지 않으며, 어린이를 도덕적으로 가르치려한다 칩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이에게 어떤 새로운 언어를 가르치되, 그 언어를 말하지 않고 그 언어로 쓰인 책을 주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이들은 도덕의 규칙과 인간존중에 대한 얘기를 듣기는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어른의 세계를 모방할 뿐만아니라, 어떤사람은 구두를 닦고, 옷을 세탁하고, 물과 오물을 운반하고, 요리를 하는데, 어떤사람은 옷을 더럽히고, 방을 어지럽히고, 남이 만들어 주는 음식을 먹는것을 참으로 당연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인생의 종교적인 원리인 인류는 형제라는 이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남으로부터 착취한 돈으로 살고, 그 돈의 위력으로 남을 부리고 있는 사람들의 부도덕한 생활리라는것이 명백하며, 입으로는 아무리 도덕을 외쳐대도 어린이 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부도덕한 영향을 피할 수 없으니, 결국 평생 왜곡된 인생관 속에서 살거나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없이 되풀이한 끝에 간신히 거기서 빠져나오는게 고작입니다.

 

교육이라는 것, 무의식적인 암시라는 것이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것, 도덕적인것이기 위해서는,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교육자(선생, 부모, 어른, 모두가 해당되는것으로 이해함)의 생활 전체가 선한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그럼 그 선한 생활이란 어떤 생활을 말하는 것이냐고 물으시겠지요. 선한생활에도 수없이 많은 단계가 있지만, 거기에는 보편적인 중요한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완성을 위한 노력입니다. 만약 교육자 안에 그것이 있고 어린이가 거기에 물들 수 있다면, 그 교육은 선한 교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를 성곡적으로 교육하기 위해서는, 교육자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교육하고 서로 협조하며 목적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 위한 방법은, 각자가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내면적으로 노력한다는 중요한 벙법 말고도 여러가지가 잇습니다. 그 방법들을 찾아 거기에 깊이 생각하고 판단한 뒤 실천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의 한 측면, 즉 넓은 의미의 인반 아동교육에 대해 살펴본 것이고, 이번에는 다른 측면, 다시 말해 학문과 교양이라는 의미에서의 교육에 대해 알아 봅시다. 나는 학문이니 교양이니 하는것은 뭐니뭐니해도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생각한 것을 일반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현자들이 생각하는 것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철학적, 종교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바로 종교이자 철학입니다. 두번째는 다양한 실험과 관찰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는 역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이며, 세번째는 여러가지 정리를 생각하고, 그 정리에서 다시 계통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 이것이 수학 또는 고등수학입니다. 이 세종류의 학문이야 말로 진정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학문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설픈 지식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요. 이 세 종류의 학문은 만국공통의 학문이며, 사람들은 분영시키지 않고 합일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것도 모든사람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인류형제의 이념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나 각 나라와 각 민족안의 법학이나 역사학 같은것은 학문이 아니며, 그것을 굳이 하군으로 친다면 유해한 학문이니 마땅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또 덧붙인다면, 학문에 이상의 세 가지 부분이 있는것처럼, 그것을 전달하는데에도 세가지 수단이 잇습니다. (부디 내가 억지로 세 개로 끼워 맞추었다고 생각하지는 말아 주십시요. 넷이든 열이든 있으면 좋겠지만 역시 셋입니다.)

그 전달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첫번째 수단은 언어인데, 언어에도 수많은 나라의 언어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또다시 인류 형제라는 이념이 요구하는데로 어학이라는 학문이 나타납니다.(만약 시간이 있고 학생들이 원하면 에스페란토어 수업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두번째 수단은 조형미술, 즉 회화와 조각 같은것으로 이것은 시각을 통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세번째 수단은 음악과 노래로, 이것은 청각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남에게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이들 여섯가지 학과 외에, 또 한가지 일곱번째 추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술공부로, 이것 역시 인류 형제의 이념적 요구에 부응하는것, 즉 모든사람에게 필요한 대장장이, 목수, 소목장이, 재봉사 같은 기술입니다. 따라서 학과는 모두 일곱으로 나누어 지 셈입니다.(요즘은 조금 다를 수 있죠?) 

나날의 노동 외에 위의 일곱가지 중 어느것에 하루중 얼마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는 학생 한사람 한사람의 성향이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교사가 교사 나름대로 가의 시간을 정하고, 학생들은 거기에 참석하든 안하든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기괘하기 짝이 없는 교육제도를 만들어 버린 우리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완전한 학문의 자유야말로, 바꿔말하면 학생들이 하고싶을 때만 공부하는 것이야 말로 효과적인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그것은 음식이 진정으로 몸에 흡수되는 것은, 정말 먹고싶을 때 먹는 경우 뿐인것과 같습니다. 다만 양쪽의 차이라 하면, 물질적인 것에서는 자유의 결려에 의한 폐해가 즉시 나타나서, 다앙 구역질을 하고 배가 아프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것에서는 폐해가 그리 빨리 나타나지 않아서, 1년이 지나도 아무 표시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비로소, 우수한 학생이 능력이 뒤떨어지는 학생때문에 제자리 걸음 하는일 없이,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고, 그런 좋은 학생이야 말로 가장 필요한 학생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가 주어지면, 적당한 시간에 자유로운 조건 아래에 배우면 괸장히 좋아하게 될 학과를 학생이 까닭없이 싫어하는, 흔히 볼수 있는 현상도 사라지고, 나아가서는 어느 학생이 어느 학과에 적성이 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학생들에게, 남에게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면서,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잔인하기 짝이없는 지적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것을 실천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유의 결려가 교육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을 아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일까요? 아니 사실은, 우리가 어리석은 흉내를 내는짓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래프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중에서(421~425쪽)

 

나의 생각: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가 1800년대 후반에 똘스토이가 정리한 이상적인 교육과 얼마나 거리가 멀리 있는지 알게 되었으며, 많은 어린이를 교육하는 부모, 교사, 그외 관련 업무를 맏고 있는 분들이 좀더 부진런히 꼼꼼히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질은 헛되고 헛된것일뿐.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진정으로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정신적인 지식과 철학의 풍부함을 교육할 수 있기는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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